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유학을 다녀왔더니 여자친구는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 거창한 형식을 생략하고 직선적인 이별 통보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사귈 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녀의 일사불란함으로 기껏 돌아온 조국에 오만 정이 떨어졌다.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고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으나 나는 계획에 따라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서울에서 면접을 봐야 해서 하루 전날 올라와 선배 집에 신세를 졌다. 오랜만에 만난 학교 선배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로 나를 괴롭혔다. 공교롭게 내가 올라온 주일, 오전 10시에 그녀는 결혼했고, 마침 그날은 추수감사주일이라 같은 시각, 나는 평소 좋아하던 목사님 교회에서 존경해 마지않는 그분이 나누는 ‘감사’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전 여친을 시집보내는 시간, 감사의 제목으로 드리는 예배. 잊지 못할 추수감사절의 기억이다.
얼마 전부터 왼쪽 옆구리가 살살 아프다. 인터넷과 유튜브의 진단을 받아보니 신장에 결석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가까운 병원에 갔더니 결석이 있어야 할 신장이 안 보인단다. 가능한 말인가? 좀 더 큰 병원을 가보라는 의사의 소견에 대학병원을 예약했다. 2주 뒤에 예약하고, 의사를 만나 소견서를 제출했다, 다시 2주 뒤에 영상을 찍고, 또 2주 뒤에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 죽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신장이 발달하지 않아 신장 하나가―없는 수준으로―기능하고 있지 않단다. 남은 신장 하나가 수십 년째 무탈한 건 대견스러운데 결론은 없는 신장이 문제를 일으킬 수 없으므로 왜 아픈지는 모르겠으니 그만 다른 과로 가보라고 처방받았다. 내가 죽을병이 아니라서 화가 많이 나셨나 보다. 드라마와 현실의 괴리는 생각보다 컸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 생신이라 주말을 이용해 시골에 내려갔다. 올라올 때는 매형 차를 얻어타고 대전까지만 가려고 뒷좌석 조카들 사이에 딸아이를 욱여넣었다. 한참 잘 가다 앞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고속도로 가운데서 사중 추돌 사고가 났다. 고속도로에서 에어백이 터지는 경험을 해본 적 없기는 40년 산 나나 4년 산 딸아이나 마찬가지다. 사고 직전까지 아내랑 통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 상황이 의도찮게 서울에 있던 아내에게 생중계됐다. 모두가 놀랐고 경황없었지만 아이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정신을 차렸다. 우리가 타던 차는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완파됐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양가는 병원으로 집합했다. 무사했지만 온 가족이 수선떨만한 하루였다.
아내가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니 헌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곧 추수감사절이다. 때마다 절기의 기원을 묻는 사람이 있고 그 해석이 난무하지만 일 년의 하루를 택해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자는데 성경에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한가. 문제는 개인적인 악연과 최근의 악재로 도무지 감사할 수가 없다. 감사는 대개 행복과 관련 있다. 내가 행복한 게 감사의 이유니까 아프거나 사고 터지는 요즘 삶이 행복하지 않아서 감사하기 힘들다. 욕망을 채움으로 행복해지려다 보니 행복할 수 없는 굴레를 벗어날 길도 없다.
마태복음 17장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산에서 신적인 예수님, 즉 예수의 영광을 경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존경해마지 않는 모세, 엘리야 님과 더불어 영광의 주님을 직접 본 그들은 영원히 그곳에 눌러앉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주님의 영광은 인간의 만물을 뛰어넘는 채움이 있다. 천국의 광채, 그 영광을 날마다 경험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얄팍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 해도―콩팥 따위가 하나 있든 없든, 차가 박살 나든 말든―나는 감사할 수 있다. 추수감사주일, 일상의 영광을 회복하는 다시 잊지 못할 날이 되길. 아멘.